잊혀질 권리 : 인성과 물성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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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질 권리 : 인성과 물성의 충돌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레미제라블’의 장발장. 쫓기는 전과자였던 장발장은 이름을 마들렌으로 바꾸고 이후 시장까지 역임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데 성공하였다.

디지털 시대ㆍ인터넷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현재. 과거를 지운 장발장은 가능한 것인가?

디지털과 인터넷 기술이 발달하기 이전, 인류는 기억에 의존하면서, 또는 종이기록에 의존하면서 망각과 싸우고 과거의 사건을 잊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많은 기억을 가진 것, 많은 종이기록을 가진 것은 책임과 개선이라는 긍정적 현상을 가져오면서 인류의 역사 발전에 기여했다.

디지털 혁명을 통하여 손쉽게 기록을 만들고 유포할 수 있는 시대, 인터넷이라는 도구와 공간을 통하여 모든 인류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접촉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인류는 이제는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너무나 많은 기록 때문에 행복해하면서 한편으로는 고민하고 있다. 인류는 더 이상 망각과 싸울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기억이라는 것만 인류의 역사에 기여한 것은 아니다. 망각 역시 인류의 역사에 크게 기여해 왔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기억에 대하여는 망각하려고 노력하였고, 때론 망각으로 인하여 과거의 기억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해왔다.

자연스러운 망각의 과정에서의 기억하려는 노력, 이것이 인류의 인성인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문명을 통하여 이루어진 인터넷은 망각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때문에 디지털 기호로 이루어진 인터넷 공간의 물성은 인성과 조화되지 못한 채 인류에게 새로운 도전을 부여하고 있다.

누구나 생성할 수 있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정보, 진보된 검색 엔진을 통하여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 망각되지 않은 정보는 인류에게 크나큰 미덕이지만, 이러한 미덕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고 새로운 출발을 막고 있으며, 이러한 미덕으로 인하여 누군가는 오프라인과 다른 온라인상의 정체성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새로운 출발을 꿈꾸지만 인터넷이 발목을 잡고 있고, 과거와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인터넷에서는 여전히 일탈자로 이해되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바로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이다. 잊혀질 권리는 2009년 프랑스와 이태리의 입법으로 혜성과 같이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으며, 이러한 이해는 많은 오해와 근거 없는 비판을 낳아 왔다.

예컨대 잊혀질 권리에 대하여 포퓰리즘의 산물, 권리의 인플레이션, 단순한 이해관계의 문제, 법체계를 무시한 정치적 구호라는 등의 비판과 비아냥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2009년 입법이 나오기 이전부터 유럽에서는 일부 이용자들의 구글, SNS 등에 대한 데이터 삭제 요청이 끊이지 않았고, 일부는 재판으로까지 이어졌다. 알려진 재판도 있지만 알려지지 않은 재판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지속적인 사법투쟁의 역사로 인하여 형성된 것이 바로 ‘잊혀질 권리’인 것이다. 즉 ‘잊혀질 권리’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번뜩 만들어진 입법산물이 아니라, 인터넷 정보 시대에서 그 잊혀지지 않는 정보 때문에 고통 받는 소수의 인류가 생존을 위하여 투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고 있는 권리인 것이다.

이들은 겉으로 봐선 거대 포털, SNS 등과 투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억만 되고 망각이 되지 않는 디지털 문명ㆍ인터넷 공간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인류의 자화상일 수 있다.

잊혀질 권리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따지고 보면 이 권리의 탄생 과정은 다른 자유권의 탄생 과정과 유사하다. 다만 시간적으로 급속하게 성장하였을 뿐이다. 2012년 1월 유럽연합은 ‘잊혀질 권리’를 새로운 regulation에 포함시켰는데, 조만간 유럽 각 국가에서도 법적 권리로 인정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유럽과 달리 다른 지역에서는 권리로 인정받는 데에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렇다면 잊혀질 권리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떻게 개념 지을 수 있는가?

‘잊혀질 권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부분은 ‘원하지 않는 데이터의 삭제’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답변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된 답변도 아니다.

‘잊혀질 권리’의 개념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있기에 다양한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권리라는 것이 단순히 개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동시에 사회적 기여도 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보면, ‘부적절한 데이터의 삭제’라고 이해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유럽연합은 부적절한 데이터의 대표적인 예로써, △ 수집목적을 다한 데이터 △ 정보주체가 동의를 철회한 데이터 △ 보유기간이 만료된 데이터를 들고 있다. 즉 그 본성상 상실되지 않는 인터넷 데이터의 ‘유효기간’을 설정하고 그 유효기간이 도래하면 데이터를 인위적으로 상실시키자는 취지이다.

나아가 △ 정보주체의 정체성과 무관한 데이터, △ 정보주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데이터도 포함시키는 게 일반적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데이터라는 것은 정보주체가 스스로 노출한 데이터(digital footprints)와 타인이 생성한 정보주체의 데이터(data shadows)로 분류할 수 있는데, 잊혀질 권리는 스스로의 데이터를 삭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의 데이터까지 삭제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다.

참고로, 전자를 ‘right to be forgotten’이라고 하고, 후자를 ‘right to forget’이라고 구분한다. 따라서 잊혀질 권리 대신에 ‘망각의 권리(right to oblivion)’라는 용어가 적절하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한편 잊혀질 권리는 정보의 유효기간을 설정함으로써 정보주체의 통제권을 강화하는 개인적 의미의 권리로 출발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 개인의 부정적인 기록을 삭제함으로써 ‘새로운 출발(clean state)’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한 개인을 낙인지울 수 있는 부정적인 기록, 예컨대 파산 기록, 전과기록, 청소년 보호처분 기록 등을 삭제함으로써 한 개인의 새로운 출발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잊혀질 권리의 또 다른 존재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잊혀질 권리는 프라이버시와 다른 것인가? 프라이버시는 격리될 권리로, 사적인 기록을 인터넷 공간에 올리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권리로 보는 반면, 잊혀질 권리는 이미 공적인 공간에 있는 기록을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시키지 않을 권리 또는 노출된 정보에 대한 자기결정으로 보는바, 두 권리는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다.

지금까지 잊혀질 권리의 탄생과정, 개념, 근거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망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망각의 본능을 가진 인류에게 망각되지 않는 디지털 인터넷 문명은 조화롭게 극복해 가야 할 ‘필요악’일 수 있다. 그리고 ‘잊혀질 권리’라는 것은 한 개인의 이기적인 주장이라고 이해하기 보다는 ‘인성과 물성 사이의 조화’라는 필연적 과정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잊혀질 권리의 인정여부와 어느 범위까지 잊혀질 권리가 인정되어야 할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잊혀질 권리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 ‘알 권리’, ‘기록 및 빅데이터의 편의와 장점’ 등의 관계를 섬세하게, 그리고 충분히 고려해야만 성숙한 잊혀질 권리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법무법인 민후 김경환 변호사 작성, 보안뉴스(2013. 1. 29.), 블로그(2013. 2. 1.)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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